‘피억압자의 교육학’이라는 제목을 들으면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 소외된 계층, 교육받지 못한 이들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프레이리의 교육 철학은 이러한 이들을 중심에 둡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뜻밖의 통찰을 얻게 됩니다. 바로, ‘억압자’ 또한 억압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쥔 자가 자유롭고 여유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레이리는 말합니다. 억압자는 억압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 역시 비인간화되고 있다고. 다시 말해, 권력을 가진 자도 결국 체제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억압자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피억압자들이 깨어날까 봐, 자신이 쥔 기득권을 잃을까 봐, 지금의 질서가 무너질까 봐 불안해합니다. 그 불안은 때로는 억압의 강화로, 때로는 위선적인 시혜로 나타납니다.
억압자의 심리 구조는 복잡합니다. 겉으로는 자신감과 통제를 보이지만, 내면에는 끊임없는 방어 기제가 작동합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이 정당한 것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규칙을 만들고, 더 강한 통제를 시도하며,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이것이 권력의 역설이며, 억압의 순환 구조입니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억압 구조를 ‘비인간화’라고 말합니다. 억압자는 타인의 인권과 자유를 억누르는 동시에, 스스로의 인간성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은 타인을 억압함으로써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과 함께 성장하고 해방될 때 비로소 인간다움이 완성됩니다.
억압자가 자신의 억압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문화 침투’입니다. 이는 피억압자의 사고방식, 가치관, 심지어 욕망마저 지배하여 자신을 억압하는 구조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프레이리는 이를 “문화적 침탈(cultural invasion)”이라고 표현합니다. 억압자는 피억압자가 스스로를 열등하게 느끼고, 그 상태에 안주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프레이리가 비판한 ‘거짓된 관대함(false generosity)’입니다.
거짓된 관대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결과만을 다루려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것은 선행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가난한지를 묻지 않고, 빈곤 구조를 유지하면서 시혜적 접근을 하는 것은 진정한 해결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조적 억압을 더욱 고착화시킵니다. 프레이리는 말합니다. “진정한 관대함은, 더 이상 손을 내밀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억압자의 이러한 심리는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높은 자리의 관료, 학교의 관리자, 시험 제도를 만든 사람들. 그들 역시 구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학생을 경쟁의 대상으로만 보는 교육 시스템, 성적과 스펙만을 강조하는 사회 풍토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억압의 사슬입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 ‘성공해야 한다’는 공포는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외 없이 작동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큰 불안을 품고 살아갑니다. 내려올까 봐, 무너질까 봐.
결국 프레이리가 말하고자 한 것은 억압자든 피억압자든, 모두가 비인간화된 사회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지 고통의 형태가 다를 뿐, 해방은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프레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억압자가 해방되면, 억압자도 해방된다. 단, 그 과정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피억압자뿐이다.”
왜 억압자는 스스로 변하지 못할까요? 프레이리는 이를 “기득권 유지 본능”이라고 설명합니다. 지금의 구조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억압자는 억압을 중단함으로써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권력이 자신을 얽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합니다.
교육 현장에서 이 같은 억압 구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권위적인 교사, 성적만을 중시하는 평가 제도, 순응을 강요하는 교칙 등은 모두 학생을 억압하는 동시에 교사 자신도 억압하는 장치입니다. 교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관리자와 학부모, 성적지표와 경쟁에 얽매여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모두가 말할 수 있는 교실’에서 시작되지만, 우리는 여전히 ‘조용한 교실’을 이상으로 여기고 있진 않은가요?
그렇다면 이 억압 구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프레이리는 ‘의식화(conscientization)’를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자신이 어떤 구조 속에 있으며, 그 구조가 어떻게 나를 규정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억압자도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두려움을 인식하고, 억압 없는 관계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프레이리 교육학의 강점은 단지 억압을 비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해결을 위한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프락시스(praxis)’입니다. 즉, 현실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해방은 말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교실에서, 가정에서, 조직에서, 관계에서 ‘대화의 시작’을 통해 조금씩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프레이리는 말합니다. “진정한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육자, 부모, 리더 모두가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고 열어가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죠.
결국 억압자도, 피억압자도 함께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각자가 처한 억압 구조를 인식하고, 그 구조를 지탱하는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진정한 해방은 그 두려움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중심에 교육이 있습니다.
프레이리의 말처럼, “교육은 중립적일 수 없다.” 교육은 해방을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억압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교육을 선택할 것인가요? 권력 뒤에 숨은 두려움을 직시하고, 모두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입니다.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식을 주입하는 시대는 끝났다 – ‘은행식 교육’의 종말 (0) | 2025.05.20 |
---|---|
진정한 교육은 해방이다 – 파울로 프레이리 교육 철학 완전 정리 (0) | 2025.05.19 |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 파울로 프레이리의 인간화 교육 (0) | 2025.05.19 |
요즘 엄마들은 다 안다! 초등 자녀 성적 올리는 AI 학습 도구 5가지 – 직접 써보니 충격 (0) | 2025.05.18 |
교사는 언제 민주주의자가 되는가 – 중학교 교실 속 ‘존엄한 수업’ 이야기 (0) | 2025.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