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그 아이는 오늘도 창밖을 봤다.
햇살이 유리창을 비스듬히 가르며 칠판 위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교사는 교과서를 읽고 있었고, 친구들은 조용히 연습장을 채우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그 아이의 마음은 이미 창문 밖의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오래 봐왔다.
낙서를 하던 손, 창밖의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
질문과 상관없는 생각에 빠진 아이들.
예전엔 그게 산만함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그 아이들은 ‘밖’을 향해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교실이라는 경계
우리는 배움을 네모난 공간 안에 가두었다.
칠판이라는 벽 앞에서, 정리된 내용과 정해진 단원을 따라간다.
이름표를 단 교과서와, 시간표에 맞춘 종소리 아래
학생은 가르쳐지는 대로, 배운다.
하지만 프레이리는 묻는다.
"교육이 삶과 단절되어도 괜찮은가?"
지식이 현실을 외면하고,
배움이 삶의 고통과 기쁨을 지나치면
그건 과연 살아 있는 교육인가?
프레이리는 '교육은 인간 해방의 실천'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해방은 언제나 삶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배움은 교과서에 있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수업 시간에 배운 수학 공식으로
시장 가격을 흥정해본 적이 없다.
과학 시간에 암기한 원소기호는
언제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윤리 시간에 배운 정의는,
현실 뉴스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했다.
대신 나는
버스 노선도를 보며 공간을 읽는 법을 배웠고,
할머니의 국 끓이는 법을 보며
화학적 반응이 아닌 삶의 기술을 배웠다.
이웃의 죽음을 지켜보며 생명의 무게를 알았고,
누군가의 편지를 읽으며 진심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 모든 배움은 교실 밖에서,
삶의 문장 속에서,
실패와 관계 속에서 나에게 스며들었다.
교실 밖에는 수업이 있다
프레이리는 말한다.
“지식은 실천과 연결될 때 살아난다.”
수업은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업은 시장에서도 일어나고,
길거리의 현수막에서도 일어나며,
혼자 걷는 밤길에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학생에게 살아 있는 배움을 제공해야 한다.
단지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부딪히고 해석하고 구성하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교실 밖의 교육은
학생이 자신만의 앎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아이들이 묻는다
“이걸 왜 배워야 해요?”
어른들은 자주 대답을 망설인다.
“그냥 알아야 해.”
“시험에 나와.”
“어른 되면 쓸 일이 있어.”
하지만 이런 대답은 아이들의 질문을 잠재울 뿐이다.
아이들은 진짜를 원한다.
살아 있는 맥락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의미를 원한다.
그러니 수업은
건축가와 함께 마을을 걸으며 공간을 해석하는 활동이 될 수도 있고,
가게 사장님을 인터뷰하며 경제를 체험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으며,
사진기를 들고 지역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교실 밖의 교육은, 삶의 무늬를 읽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교사는 안내자, 삶은 교과서
교사가 모든 해답을 줄 필요는 없다.
프레이리는 교사를 “함께 배우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삶을 이해하는 방법은 정해진 답안지가 아니라
질문을 만드는 기술에서 시작된다.
교사는
학생이 삶을 탐색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현실에서 배운 것을 학교 안에서 해석하도록 도우며,
배움의 순간을 학생 자신이 명명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존재다.
그러기 위해 교사는 종종
자신의 역할을 내려놓고,
삶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억 속 배움은 늘 ‘체험’이었다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수업은 언제였을까?
누군가와 함께 만들었던 연극,
직접 쓴 시를 마을 벽에 붙였던 일,
농사를 짓고 시장에 팔았던 체험학습.
그 순간들은 시험과 무관했지만,
인생과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식은 사람과 엮일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추상적인 개념도,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때 진짜 의미가 된다.
프레이리는 이를 ‘삶과 연결된 앎’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앎이야말로
학생을 움직이게 만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씨앗이 된다.
삶의 현장에서 배운다는 것의 의미
아이들이 교실 밖에서 배우는 순간은 단순한 체험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배움은, 교과서의 문장을 살아 있는 언어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직접 마주치고, 불완전한 답을 실험하고, 때로는 실패 속에서 더 큰 통찰을 얻습니다.
프레이리는 이런 과정을 ‘현실 읽기’라 불렀습니다.
그가 말한 교육은, 글자를 해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와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실 바깥의 교육은 학생이 자신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자신의 언어로 질문하며, 스스로를 세상 속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렇게 배운 학생은 지식을 넘어서, 책임감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배움을 삶의 방식으로 삼는 사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벽을 허물고, 문을 열고,
세상의 바람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게 합시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배움은 드디어 살아 숨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깥의 바람을 수업 안으로 들이자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지금 이 교실은,
아이들의 삶을 품고 있는가?"
벽을 허물지 않으면
배움은 갇혀버린다.
지식은 공간을 넘어야 하고,
학생은 책장을 덮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프레이리는 배움이 현실과 맞닿아야 한다고 했다.
진짜 교육은 시험지 위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니 오늘 수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오늘은 교실 바깥에서 수업합니다.”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KMA 한국수학학력평가 접수 마감 D-8 ! 신청 관련 정보 (1) | 2025.05.23 |
---|---|
가르친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다 – 신뢰 기반 교육의 힘 (0) | 2025.05.23 |
읽고 쓰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 비판적 리터러시란? (0) | 2025.05.22 |
배운 대로 살 수 없다 – 교과서의 권위에 도전하기 (0) | 2025.05.22 |
학교는 억압을 재생산하는가? (0) | 2025.05.22 |